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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박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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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문화탐방

효자박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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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군대소면 오류리 방기미 부락에 효자 박정규의 효자문이 있다. 박공은 조선후기 경종, 영조 년간인 1700년대의 사람으로 자(字)를 헌지(獻之)라 하고 동지(同知) 박진구의 아들로 태어난 음성인이다.

원제 김한선생의 문인으로 공부하여 김공의 영향을 받아가며 성장하여 1721년(경종원년)에 진사시험에 급제하였고 선능참봉을 거쳐 아산 현감을 지내면서 목민관으로서 현민을 돌보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천품이 겸손하여 정직하였고, 성격이 강직하여 스스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결단하여 실천하는 용기가 있었으며 나아가고 물러섬이 분명하였다 한다.

도덕이란, 결국 인간이 인간답게 행하여야 할 올바른 도리라고 할 때 , 평범한 인간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일'을 올바르게 실행하는 일이다.
박공은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지성과 용기를 다하여 실천한 인물이다. 공이 어렸을 때 동료 아이들과 같이 이웃집 밤나무 밭에 들어가서 '밤서리'를 하였는데 다른 아이들은 서로 많이 따기 위하여 앞을 다투어서 정신없이 서두르고 야단일 때 박공만은 하나도 손대지 않고 그냥 서있었다.
동료 하나가 정신을 차려보니 그 모양이라 가까이 와서 까닭을 물으니 "나는 부모의 허락없이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다."하고 대답을 했다.

옛날에는 시골에서 흔히 '서리'가 장난겸 놀이처럼 행하여졌다. 여름철이면 참외·수박서리, 가을철이면 감서리, 콩서리, 기나긴 겨울밤에 입맛이 근지러우면 서당배들이 남의 집 울타리까지 넘어 들어가서 곤히 잠자는' 닭'이라도 한두 마리 잡아다가 삶아 먹어도 별탈이 없는 인심이었다. 혹시 주인에게 들켜도 "허허 고이연 놈들" 하고 웃어넘겼다.

여하튼 박공은 부모의 허락없이는 티끌 만한 것이라도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고 부모의 근심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만큼 공은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지성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의복이나 음식은 반드시 부모가 먼저 취하게 하고 자기는 그 후에 부모의 허락을 기다려서 태도를 결정하였다 한다.

어느 날 공의 아버님이 병환이 났을 때의 일이다. 의사를 데려다 진맥을 하고 여러 가지 참역을 썼으나 별로 차도가 없었다.
"천지 신명이시여, 조상님 들이시여, 이 어리석은 것이 정성이 부족하여 아버님의 병환이 차도가 없나 봅니다. 아버님의 아픔은 곧 내 아픔과 같고, 나같은 불효자는 또 낳으면 되려니와 하나 뿐인 아버님은 돌아가시면 영영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 살려주소서"하고 방으로 돌아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수혈하였다. 그랬더니 약간 차도가 생기는 듯하더니 역시 큰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이튿날 더 많은 피를 내기 위하여 할복 수혈을 하였더니 이번에는 차차 회복이 되어 며칠 사이에 쾌차하게 되었다 한다.

이것은 공의 지성과 용기와 효도의 결과였다.
공은 그후 안산현감을 끝으로 세상을 뜨니 66세였고 현재 대소면 오류리에 효자문이 있다.

(음성군 <내고장 전통가꾸기>)